49년 동안 진주대첩 7만 호국영령 위령제 지내
49년 동안 진주대첩 7만 호국영령 위령제 지내
  • 조현웅 기자
  • 승인 2018.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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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갓 넘은 1967년 개인차원에서 지내던 것이 2012년 사단법인화
진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의 기금,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세우는 초석돼
18년 간 대구에서 점 집 운영, 사흘, 나흘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 있어
부동산에 재주가 있어 부동산으로 자식 7남매 조카 7남매 등을 공부시켜
장회장에게 고향사람들이 진주시 미천면 덕진리에 효부, 효녀비석 세워줘

장순자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이령제 제전위원회 회장

장순자 회장은 49년 동안 진주성에서 순국한 7만 호국영령들의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장순자 회장은 49년 동안 진주성에서 순국한 7만 호국영령들의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장순자 회장(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이령제 제전위원회)은 보릿고개를 갓 넘은 1960년 대 후반부터 개인의 힘으로 진주성에서 순국한 7만 명의 호국영령들의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올해로 49회째이다. 그동안 지내지 못한 한두 번을 감안하면 반세기 동안 혼자의 힘으로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도 하기 힘든 일을 개인이 해 오고 있다. 장 회장이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호국영령들의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산 사람을 잡아가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남강 백사장에서 시작한 호국영령 제사가 올해로 49회째를 맞게 됐다.

1980년대 중반 서슬이 퍼랬던 전두환 대통령이지만 당시 진주를 방문하여 자신이 홀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시고는 대통령이 거액을 쾌척하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장 회장은 이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진주시에 보내 지금의 계사순의단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계사순의단은 진주시 예산을 합쳐서 1987년에 만들어 졌다.

세월이 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규모도 달라졌다. 2012년에는 정식으로 사단법인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김두관 지사 시절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이령제 제전위원회란 이름의 사단법인을 허가 받아 이제 사단법인이 호국영령들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장 회장은 이 법인의 회장 직을 맡고 있다.

지금까지 호국영령들의 제사에 진주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진주시는 호국영령들의 제사를 무시했다. 특히 이창희 전 시장은 재임기간 8년 동안 단 한번도 제사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장은 예산에 반영하여 한해에 200만 원 정도의 지원금을 진주시 예산으로 보내오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관심을 가진 것이 이 정도라는 게 장 회장의 회고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문백 시장이나 하순봉 전 국회의원 등은 호국영령들의 제사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져주었다고 한다. 1989년 7만 호국영령들을 모시기 위해 지리산 중산리에 약수사를 창건하여 매일 기도로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장 회장은 남은 인생동안에도 힘이 닿는데 까지는 호국영령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낼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장 회장은 1941년 진주시 미천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13살에 신을 받고 19세에 시집을 왔으나 가난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또 무당이란 멸시 때문에 진주에서 살지 못하고 18년간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점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대구에서 점집을 운영할 때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번호표를 받고 사흘 나흘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장 회장은 그러나 복채를 많이 받지는 않았다. 복채를 정도이상으로 받으면 꼭 사고가 나서 복채는 꼭 이웃을 위해 사용하곤 한다.

장 회장은 자신이 낳은 7남매를 비롯해 조카 7남매 등 14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장 회장은 이들을 공부시킨 것은 복채로 한 게 아니라 부동산을 해서 번 돈이라고 했다. 어느 날부터 부동산에 재주가 생겨 건물만 사면 돈을 벌곤 했다. 그래서 80이 다 된 지금도 부동산에는 자신이 있다.

장 회장의 고향 미천면 덕진리에서는 고향사람들이 장 회장이 부모 자식을 훌륭히 키운 것을 기려 효녀, 효부 비를 세워 주었다.


△진주성에서 순국한 7만 호국영령들의 위령제를 지내고 있는데 언제 첫 제사를 지냈나.

-1967년 진주 남강 백사장에서 처음 지냈다.

△이렇게 49년째 제사를 지내게 된 계기가 있나.

-당시 논개 할머니 제사를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논개할머니 제사를 지낼 때 마다 꼭 한명씩 죽는 사고가 났다. 호국영령들이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국 영령들을 위로해야 이렇게 산 사람을 데려가는 일이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호국영령들의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그런 일이 없었나.

-그렇다. 개인적 사정으로 제사를 게을리 하면 내 신상에 꼭 변고가 생겼다. 그래서 이 제사를 그만둘 수가 없다.

△제사는 어떤 방식으로 지냈나.

-처음에는 의암 바위에서 강물로 뛰어내려 호굴영령들의 혼을 건져 올린 다음 이 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계사순의단에서 제사를 지낸다.

△올해로 49년째 제사를 지내게 되는 데 참으로 긴 시간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해 오면서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고 나서 진주를 방문한 적이 있다. 1986년인가 그랬다. 그때 마침 제가 호국영령들의 제사를 지내던 때였다. 전 대통령이 그것을 보고는 안병규 당시 국회의원에게 지시하여 국가가 해야 할 일인데 개인이 하는 것이 대견하다며 격려금을 주셨다. 그런데 그것을 제가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진주시에 기부하여 지금의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을 만든 자금이 됐다. 진주시 예산을 보태 만들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일부러 제사를 보러 온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들었다. 당시 유등축제 등을 보러 진주를 방문했던 것 같다.

△계사순의단에서 제사를 지내면 혼은 어떻게 하는가.

-계사순의단에서 제사를 지내도 호국영령들의 혼은 남강에서 불러와 지낸다.

△그동안 기억에 남는 일은

-제삿날을 받고 나면 진주시민들의 자제들이 잘 되는 모습이 눈에 보이곤 한다. 또 물에 빠져 죽거나 하는 일도 없어진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한해 제삿날을 받아 놨다가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제가 뇌수술을 하게 되더라. 또 어떤 해는 다른 사정이 있어서 제사를 못 드렸는데 제 허리가 부러져서 7번 수술을 했다. 제가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이렇게 저를 치신다. 그래서 호국영령들의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장 회장 개인이 해 왔는데 시나 도에서는 지원이 없었나.

-진주시에서 2년 전부터 한해에 200만 원 정도 지원한다. 참으로 한심스럽지만 그래도 시에서 관심을 가져준다는 의미가 있어서 받기는 한다.

△그동안 진주시장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나.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은 문백시장이었다. 문백 시장은 시 예산이 없으니 주로 개인 돈을 주었다. 가장 관심이 없었던 사람은 이창희 시장이었다. 이 시장은 8년동안 제사지내는 데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경찰서장 가운데는 1980년대 진주서장을 지낸 오봉득 서장이 기억에 남는다. 꼭 참여하셔서 금일봉을 전달하곤 했다.

△그럼 제사에 들어가는 예산은 어떻게 마련하나.

-주로 제가 마련한다. 제가 운영하고 있는 지리산중산리 약수사에서 자금을 가지고 오고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제사를 지낸다.

△지금은 사단법인이 됐는데 언제 됐나.

-개인적으로 해 오다가 2012년에 사단법인을 만들어 지금은 법인차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법인의 이름은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위령제제전위원회’이다. 제가 회장을 맡고 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실 제사 자금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젊어서는 열정이 있으니까 자금 마련하는데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다 보니 그렇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정부에서 예산을 들여서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예산만 지원해 주면 제사는 제가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해 모실 수 있다.

호국영령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
호국영령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

 

△이렇게 반세기 가까운 시간동안 제사를 지냈는데 소감은.

-진주성에서 순국한 7만 명의 민관군 호국영령들은 우리가 교과서에 실어서 후손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할 정도로 의미가 크다. 그런데 아직까지 진주시민들이 이런 부분에 대한 생각들이 깊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 역사상 7만 명이 전사한 전투가 없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도 진주시민들이 7만 호국영령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희망한다.

△올해 77세인데 어디에서 태어났나.

-진주시 미천면에서 1941년 태어났다.

△신은 언제 받았나.

-시집 오기 전 13살에 신이 내렸다.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받게 됐다.

△시집은 언제 왔나.

-19살 때 진주로 왔다.

△남편은.

-4년 전에 돌아가셨다.

△자녀는 모두 몇 명인가.

-9남매를 낳았는데 2명은 홍역으로 잃고 지금 7남매가 다 잘 돼 있다. 친 자녀뿐 아니라 큰 집의 조카 4명, 동생 자녀 3명을 함께 키웠다. 14명의 아이들을 키워 다 잘 살고 있다. 그것이 제가 한 일 중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다. 저는 배우지도 못했지만 자식 조카들은 다 공부시켜서 각 분야에서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다.

△어떻게 이들을 이렇게 잘 키웠나.

-비단장사를 했다. 그래서 중앙시장에서 포목점을 하신 박대출 국회의원 부모님하고도 잘 알고 지냈다.

△무속인이 비단장사를 해서 돈을 벌 수 있나.

-비단을 떼 와서 신이 가라고 하는 곳에 가면 잘 팔리고 가지 말라고 하는 데를 가면 도둑을 맞거나 잘 안 팔렸다. 그래서 신이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장사가 잘 됐다.

△무속인이 동네에서 지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진주에서 살지 못하고 대구에 가서 18년을 살았다.

△무속인으로는 성공한 편인가.

-당시 대구에서 저를 만나려면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달성공원 근처에서 운영을 했는데 번호표를 받아서 기다려야 저를 만날 수 있었다. 또 대구 내당동에서 할 때에도 저를 만나려면 사흘, 나흘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런 복채만으로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키울 수는 없었을 텐데.

-복채로 아이들을 키우지는 않았다. 복채는 많이 받을 수 없었다. 많이 받으면 꼭 사고가 생겼다. 그래서 복채는 적당한 금액 이상은 받지 않았다. 아이들을 키운 돈은 부동산을 해서 벌었다. 대구에서부터 부동산에 눈을 떴는데 그 방면에 제가 좀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지금도 돈은 주로 부동산을 해서 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건물하나를 4억 원에 팔아서 혁신도시에 조그만 건물을 하나 사면 3~4년 후에는 한 3억 원 정도는 벌 수 있는데 건물이 잘 팔리지 않는다.

△나이 80에 부동산 투자를 한다는 게 신기하다. 장 회장이 부동산에도 신기가 있나.

-그런 게 아니고 제가 부동산에 좀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지리산 중산리에 약수사 절을 가지고 있는데 이 절은 어떻게 해서 지었나.

-1989년에 창건을 했다. 이 절은 단 한 사람의 시주도 받지 않고 오로지 저 혼자 힘으로 지고 이고 해서 만든 절이다. 여기에다가 7만 호국영령들을 모셨다.

△효부 효녀상도 받았는데

-미천면에서 상을 주고 비석도 세워줬다. 현재 미천면 덕진부락 고향동네에 비석이 서 있다.

조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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